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 소설은 어떻게 쓰여지는가
정유정, 지승호 [공]지음은행나무
( 출판일 : 2018-06-20 )
작성자 :
이○림
작성일 : 2024-11-04
페이지수 : 263
상태 : 승인
작가들은 말한다. 나만의 이야기를 찾으라고.
나만의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도통 알 수 없어 헤매일때, 누군가 이 책을 추천해 읽게 되었다.
그저 그런 내용이겠지...작가들이 으레 하던 그런 말이겠거니 생각하고 기대없이 읽다가 흠뻑 빠져버렸다.
작법서로 보기엔 너무 말랑해보이고 분량도 너무 짧아
이 작은 책에 건질만한 내용이 있을까 의심하며 읽던 내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고
외양과 어울리지 않는 묵직함으로 내게 깊숙히 박히는 문장들을 심어 놓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한두 가지의 테마 - 자신만의 세계 - 를 평생토록 변주한다고 한다.
헤밍웨이는 죽음에 직면한 인간에 대해, 디킨스는 가족 혹은 아버지를 찾아 헤매는 소년의 이야기를,
스티븐 킹은 인간 심연에 잠재하는 공포에 대해 일관되게 그려냈다.
나는 인간 본성의 어둠과 그에 저항하는 자유의지에 관심이 많다. "
"인간은 누구나 이중성을 가진다.
그 내면에는 햇빛이 비치는 탁 트인 벌판이 있고 빛이 들지 않는 심연이라는 어두운 숲이 있다.
이 숲에는 인간 삶에 문제를 일으키는 온갖 야수들이 잠들어 있다.
질투, 시기, 분노, 증오, 혐오, 욕망, 쾌락, 공포, 절망, 폭력성...
이 야수들을 깨우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하다.
요컨대, 이 어두운 생명체들은 점화에 의해 각성되는 것이다.
이 숲은 민들레 홀씨처럼 어느 날 갑자기 불현듯 날아와 형성된 것이 아니다.
땅속에서 불쑥 자라나 숲을 이룬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린 안에 이런 숲이 왜 존재할까.
숲에 갇힌 야수들이 어느 날, 어떤 일을 계기로 눈을 뜰까.
무엇에 의해 점화될까.
이들을 의식의 수면 위로 추동시키는 힘은 무엇일까.
이 힘이 운명의 폭력성과 결합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과연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자유의지로 극복할 수 있을까...
나는 이런 의문들을 오래전부터 품어왔고, 이것이 적절한 소재와 결합되는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운명적 사랑을 만난 것처럼 열이 펄펄 끓고 온 정신이 거기에 집중되고,
세상은 그것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야기가 내게로 와서 나의 세계가 되는 순간이다. "
"문학이 한 개인의 삶 혹은 삶에 대한 시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람을 죽이는 건 최고로 나쁜 짓이다라고 배워온 내가
살인이 구원일 수도 있다는 도덕 이면의 진실을 깨달은 건 열다섯 살 때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항쟁이 있었던 바로 그때..."
그가 가슴이 뛴 이유와 다른 이유로 나는 가슴이 뛰었다.
작가의 숙명 어쩌면 본질을 말하며 단숨에 나를 사로잡는 그의 문장 때문에 가슴이 뛰었다.
작가란 이런 것이구나...
망망대해처럼 보이는 나의 글찾기가 이렇게 이뤄지는 구나...
나의 글을 만나는 순간이란 이토록 황홀한 것이구나...
그 글이 누군가를 놀라게 하거나 가슴뛰게 하거나 감동케 하지 않아도
그런 벅찬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글을 써야 하는 이유는 충분했다.
이로써 문학이 한 개인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그의 말을 나도 믿어보기로 했다.